서동혁(2019-06-18 09:57:25, Hit : 294, Vote : 34
 분석심리학적 자아, 정신적 실재와 불교


                                          
1.자아-무아(無我)

융은 자아를 의식의 중심이면서 고도의 연속성과 동질감을 가진 생각들의 복합체라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자아복합체(Ich komplex)라고도 하였다.
정신의 내용이 의식되기 위해서는 자아와 관계가 되어야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고
전체정신의 중심은 아니다. 자아가 알면 의식이고 자아가 모르면 무의식이다. 의식은 전체정신의 일부이다. 수많은 콤플렉스가 자아에 알려지지 않고 무의식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기는 전체정신, 전체인격을 의미한다. 전체정신은 자아가 알 수 없으므로 자기는 가설이다.
경험적으로 자기는 꿈, 신화, 동화 등에서 왕, 영웅, 예언자, 구원자 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원, 사각형, 십자가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극의 쌍(음,양,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이나 만다라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는 자아에 대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제행무상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되나 모든 존재에 고정 불변하는 주체라 할 것이 없다는 제법무아에 대해서는 이해는 되나 “내가 없다.”라는 의미를 감정적으로 수용하고 동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내가 있다.”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자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지혜를 중시한다. 지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바른 이해(正見)를 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에서 어리석음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마음이 밝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어두워서 바른 이해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 때문에 생기는 탐욕과 분노에 의해 정신적 고통이 생긴다고 한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밝게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불교에서 요구하는 믿음은 어리석음이 줄고 올바른 앎이 커지면 인생의 고통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여 이해하고 이해를 체험화하기 위하여 명상수행을 하여 의식의 깨어있음이 증가하면 이해가 지적수준에서 체험적 수준으로 바뀌어 가고 어리석음이 줄어드는 만큼 고통이 감소할 것이다.
무아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없다.”이다. 사람들은 이 말에 큰 혼란을 느낀다. 우리의 의식은 “내가 있다.”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마치 발을 디디고 있는 지반이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무아의 의미를 심리적으로 설명하면 “내가 있다.”는 의식이 끊임없이 일으키는 생각이다.”라는 것이다.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하면 뇌의 일부가 끊임없이 “내가 있다.”라는 생각을 만들고 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에 수십억명의 인간이 살고 있고 수십억개의 뇌가 작동하고 있는 데 수십억의 뇌들이 그 뇌가 작동하고 있는 생명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생명현상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이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서 끊임없이 “내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이 생각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특별하고 개별 독립적인 존재라는 왜곡된 생각을 하며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는 현대사회의 많은 분들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장이 신경세포와 근육세포들로 이루어진 펌프 역활을 하는 구조를 가지고 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기능을 평생 끊임없이 하듯이 뇌의 일부는 “내가 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유지하며 이 생각을 토대로  이분법적인 분별을 하여 나와 대상이 생기며 대상에 대한 분별에 의한 지식이 축척되어 과학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를 중심좌표로 해서 시간과 공간도 생기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자아의식의 강화가 중요하며 이 중심에는 “내가 있다.”라는 생각이 있다.
심리학에서 연속적인 자아의식은 약 7세경에 형성된다한다. 그 전에는 “내가 있다.”는 생각의 연속성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가 죽어도 어린이들은 어디 갔다고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고 뛰어논다. 7세전 일들은 단편적인 기억이 일반적이다. 사춘기가 되며 자아의 강화가 일어난다. 추상적 개념의 발달로 ‘나’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평가도 하며 열등감을 가지기도하고 권위에 반항하며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중심이 되는 자아의 기능에 의하여 의식이 확대되며 도덕, 철학, 과학 등이 발달되고 인류의 뇌는 진화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내가 있다.”는 생각에 속아서 독립적이고 실제적인 내가 있다고 착각함으로 생기는 탐욕과 분노에 휘둘리며 고통을 받고 살지 말고 지구라 불리는 행성에 출현한 인간이라 분류되는 한 생명체의 뇌가 만들어내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명에서 벗어나 탐욕과 분노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아기능은 소중한 것이다. 자아에 의한 분별적 의식의 발달은 지구의 생명체 중에서 인간을 가장 상위의 생물의 종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장점을 살리되 착각에 의한 집착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나서 자비로운 공존의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알려준 것이 불교이다.
이제 “내가 있다.” “내가 없다.”라는 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의미 없는 논쟁은 사라지게 된다. 다만 인간이라 분류되는 한 생물의 종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느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분석심리학의 자아에 대한 견해는 유식불교의 제7식 마나스식에 대한 설명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2.정신적 실재-유식무경(唯識無境)

융은 분석심리학은 경험심리학으로 의식의 경험을 관찰대상으로 하여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학문이며 형이상학이 아니라 하였다. 예를 들어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의식 경험에서 신은 어떤 존재로 나타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귀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코끼리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에서 경험 되지 않는 것은 정신적 실재가 아니며 알 수가 없다.  
삶은 생물학적인 생명현상이 시작되어 소멸되는 과정으로 삶의 과정에서 인간의 경험은 정신적인 것이다. 의식에서 경험된 것이 인간의 경험이다. 정신적 내용물이 자아와 관계를 가질 때 의식이 된다.
융은 의식의 기능을 감각, 직관, 사고, 감정의 4가지로 분류하였고 정신적 경험도 4기능으로 나타난 의식의 내용물이 자아에게 경험될 때 실재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세계를 5온 18계로 분류하고 간단히 물질과 정신이라고 나누기도 한다.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 물질은 감각이고 정신은 직관, 사고, 감정이다.
인간은 대상을 파악한다는 측면에 치우쳐서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합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주관이 없으면 객관도 없으므로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관찰은 불가능하다. 정신적 실재는 외부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실제로는 의식에 인식된 정신적 경험이라는 통찰을 의미한다.
앎이라는 신비한 능력이 감각, 직관, 사고, 감정이라는 의식기능을 통하여 작동하여 의식에  앎의 내용물이 생기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통찰을 불교에서는 유식무경, 일체유심조라고 표현하였다.
자아라는 의식의 중심에 의하여 나와 대상의 분별이 생기고 지금이라는 시간의 기준점, 상하좌우의 중심이라는 공간의 기준점이 생기어 시간과 공간이 생긴다.
이러한 자아의식에 의하여 만들어진 시공간의 무대에서 나와 대상을 분별하며 오온으로 이루어진 경험을 하는 것이 삶이다.
정신적 실재는 외부의 대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의식이라는 모니터를 통하여 세계를 보며 그것을 벗어날 수 없고 의식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기와 자기실현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zero